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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저격 브런치 카페 [Q카페]

 

 

 

[큐카페 전경모습]

 

한옥 스타일로 보이는 외관,
2017년 5월 19일 부여에 새로운 브런치카페가 오픈을 했다.

평일과 주말의 영업시간과 정기휴일이 적혀있는 글귀를 입구에서 만날 수 있다.

 

 

 

내부에 들어서자 높은 천장에 마음까지 시원스럽다.

갈색톤의 전체적인 색감에 벽돌과 나무탁자와 의자의 인테리어는 차가운 느낌 보다는 따뜻한 느낌으로 전체적으로 깔끔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큐카페 내부모습]

 

[큐카페 내부모습]

 


부여에서는 아직 생소한 브런치카페!!
대전에서 직접배워온 브런치메뉴들을 사장님의 입맛에 따라 연구를 거듭하고 노력한 결과 사장님만의 새로운 메뉴가 탄생했다.
그렇게 탄생한 메뉴가 바로 샌드위치 1개와 종류에 따른 파니니 3개, 큐카페에서 가장 잘 나가는 큐브런치이다. 

 

 

[큐카페 내부모습 ]

 

[큐브런치 메뉴]

 

[불고기파니니 메뉴]

 


입맛이 예민해서 신선한 재료만을 사용한다는 사장님은 처음 브런치카페를 열기 전 2~3년동안 전국의 카페만 둘러보며 사전조사를 실시했다. 그리고 커피 공부를 병행했다.
전문적으로 다니면서 먹어보고 눈으로 공부하며 연구한 끝에 바리스타 자격증과 큐브레이더 자격증을 거머쥘 수 있었는데, 향미평가서와 시험과목이 20가지나 되는 큐브레이더 자격증을 따기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지만, 그 때의 열정만큼은 그 누구보다 빛났다고 그는 말한다. 
(큐그레이더자격증: 커피의 원재료인 생두의 품질을 평가하고 맛과 향을 감별해 커피의 등급을 정하는 감별사)

 

[큐그레이더 자격증]

 

[큐카페 드립커피]

 

로스팅부터 핸드드립까지 사장님의 손을 거치는 이 곳의 커피 맛과 향기는 끝내준다.
일본식으로 스윗드립으로 시간과 용량을 맞춰서 최고의 커피를 선사하는데, 그 향과 맛에 부여분들 뿐 아니라 부여를 찾는 관광객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분위기 뿐만 아니라 맛까지 사로잡는 브런치 카페 "Q카페"를 꼭 찾아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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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부여군 규암면 신리 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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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장군의 생가터. 지금은 후손인 박병호씨 부부가 살고 있다.박영희 장군의 생가터. 지금은 후손인 박병호씨 부부가 살고 있다.

생가의 처마와 기둥. 아주 오래된 당시 건축물임을 증명하고 있다.생가의 처마와 기둥. 아주 오래된 당시 건축물임을 증명하고 있다.

옆에서 바라본 생가.옆에서 바라본 생가.

 

가곡1리는 충절로도 으뜸이다. 그중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끈 김좌진의 남자 박영희 장군의 생가가 아직도 남아 있다.

 

박영희 장군은 조선 말기 좌승지를 지낸 박시순의 손자다. 박영희는 이곳 신명의숙 출신으로 휘문의숙에 진학하여 신학문을 배운 뒤, 신흥무관학교를 나왔다.

 

박영희 장군. 그가 장군은 아니라는 설도 제기되고 있으나, 이미 김좌진이 청산리 전투 이전에 사령관으로 장군직함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도 1925년 사령관직을 수행함에 따라 장군으로 칭송해야 타당하다. @사진출처 : 천안독립기념관 홈페이지박영희 장군. 그가 장군은 아니라는 설도 제기되고 있으나, 이미 김좌진이 청산리 전투 이전에 사령관으로 장군직함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도 1925년 사령관직을 수행함에 따라 장군으로 칭송해야 타당하다. @사진출처 : 천안독립기념관 홈페이지

 

북로군정서 학도단장을 맡았고, 1920년 여름 김좌진 장군의 부사령관으로 청산리 전투를 치른 독립군이다.

 

그는 1925년 신민부 보안사령관을 지냈으나 5년 뒤인 러시아 고루지게에 독립군지원을 요청하러 갔다가 피살당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박영희 장군 생가에 있는 귀옹영당. 가정내에 영당이 있는 곳은 충청도에서도 유일무이하지 않을까 한다.박영희 장군 생가에 있는 귀옹영당. 가정내에 영당이 있는 곳은 충청도에서도 유일무이하지 않을까 한다.

영당 안쪽 문.영당 안쪽 문.

귀옹 영정. 귀옹 박경후의 영정이다. 현재는 가본이고, 진본은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평상복을 입고, 가슴에 옥뱃지, 의자에 호랑이 가죽 등이 눈에 띈다. 귀옹 영정. 귀옹 박경후의 영정이다. 현재는 가본이고, 진본은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평상복을 입고, 가슴에 옥뱃지, 의자에 호랑이 가죽 등이 눈에 띈다.

박병호씨의 조부와 조모의 사진. 조선말기에서 일제강점기 사이에 촬영한 듯 보이는 자료다. 이 사진도 영당에 함께 모셔져 있다. 발 아래 작은 분재가 놓여진 것이 인상 깊다.박병호씨의 조부와 조모의 사진. 조선말기에서 일제강점기 사이에 촬영한 듯 보이는 자료다. 이 사진도 영당에 함께 모셔져 있다. 발 아래 작은 분재가 놓여진 것이 인상 깊다.

 

박영희 장군의 생가에는 조상들의 영당이 있다. 조선 중기 문신인 박경후(朴慶後)의 영정이 있었던 곳이다. 현재 진본은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귀옹 영당이라고도 불리는데 조선 후기 좌승지를 지낸 박영희 장군의 조부 박시순이 이곳에 자리를 잡으며 영당을 세운 듯 하다.

 

시전, 서전, 논어, 주역, 맹자 등이라 써있는 함 안에는 고서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시전, 서전, 논어, 주역, 맹자 등이라 써있는 함 안에는 고서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이 건물이 지어진 내력을 알 수 있다. 병술년 7월 15일 기사(?) 미시 입주상량이라고 쓰여 있다.이 건물이 지어진 내력을 알 수 있다. 병술년 7월 15일 기사(?) 미시 입주상량이라고 쓰여 있다.

 

 

더욱 충절이 아직도 느껴지는 것은 이 집에 거주하는 박병호(67), 유희정(64)부부가 집안을 보존하고,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것이다.

 

석성에서 살다가 장손의 집안에 시집와 40년을 살은 희정씨는 한 해에 열 두 번도 넘는 제사를 지금까지도 챙기는 효부다.

 

시어머니가 시집살이를 하지 않으셨다고 해요. 그래서 종갓집인데도 정말 편히 살아왔어요.”

 

종갓집 며느리 유희정씨. 입가에 미소가 그득하다. 종갓집 며느리 유희정씨. 입가에 미소가 그득하다.

 

처음엔 아름다운 꽃밭과 서른 칸이 넘는 방을 가진 으리으리했던 집안에 시집와 지금까지 살았던 그는 힘들었을 법한 세월임에도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하다.

 

주춧돌에 집이 반듯이 서 있는 게 대견할 정도다. 어림잡아 100년도 훨씬 더 된 것 같은데 그저 지붕이나 바꿔고, 조금씩 현대식으로 바꿨는데 한옥의 틀은 단단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그이가 이 집에 손을 대는 것을 참 싫어해요. 집이 북향이고, 문도 앞뒤로 나 있어서 얼마나 바람이 심했는지... 지금은 안에 보일러도 놓여 있지만 젊은 애들은 아직 불편하다고 하는데, 오래 살아서 그런지 이제는 불편한지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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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회관에서 바라본 곡부마을.마을회관에서 바라본 곡부마을.

 

부여 은산면 가곡1. 초입에 곡부마을이라는 초석이 마을 방향을 가리킨다.

 

가곡리는 크게 가곡과 고부실, 아가벌로 나뉘고, 1리는 고부실이라 불린다. 고부실은 초막동, 아랫뜸, 아랫고부실, 참나무쟁이, 채빙골, 꼭두마리, 가안고개 등의 지명이 전해져 온다.

 

이 마을은 풍수지리 책인 만산도비기(萬山圖祕記)곡부(曲阜)에 매화낙지(梅花落地)형 양택 명당이 있다백자천손(百子千孫) 명공거경(名公巨卿)이 대대로 삼성팔현(三聖八賢)이 나올 자리라는 기록이 전해진다.

 

, 정감록에도 이곳을 십승지지(十勝之地 梅花落地)로 기록돼 있다고 한다.

 

마을 가운데에 있는 축사. 소들이 지나가는 이들을 바라보는 눈빛이 애교스럽다.마을 가운데에 있는 축사. 소들이 지나가는 이들을 바라보는 눈빛이 애교스럽다. 

 

실제로 남쪽에서 북향하는 매화봉 줄기가 마을을 양 팔로 감싸 안고 있는 지형을 가졌다.

 

그래서인지 이 마을은 근대 이전에도 많은 인물이 났다고 한다. 이 마을에 들어왔던 이들 중에는 명당을 찾아서 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옥가실은 진주유씨가, 고부실은 기계유씨가 최초로 정착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두 마을 모두 함양 박씨와 청송 심씨, 연안 송씨가 차례로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가까운 마을이라고 해도 진주 유씨인지, 기계 유씨인지 여부는 더욱 조사해 봐야 할 사항이다.

 

옥가실에는 진주유씨 삼대묘가 있다. 승정원 좌승지를 지낸 유희택과 도총관을 지낸 아들 유전, 대제학을 지낸 유경손은 중종 19년부터 명종에 이르기까지 삼대가 모두 고위 공직을 거쳤다.

 

곡부서당 건물 전경.곡부서당 건물 전경.

 

곡부서당에 남아있는 벽면 글귀. 서당의 하루 시간표가 나타나 있다. 새벽 5시부터 시작되는 일과에 오전 7시와 11시, 오후 2~4시, 오후 8시가 비어 있다. 꼭 밥을 먹는 시간과 오침을 하는 시간을 비워둔 듯 하다. 모든 일과는 밤10시나 돼야 끝난 것으로 보인다.곡부서당에 남아있는 벽면 글귀. 서당의 하루 시간표가 나타나 있다. 새벽 5시부터 시작되는 일과에 오전 7시와 11시, 오후 2~4시, 오후 8시가 비어 있다. 꼭 밥을 먹는 시간과 오침을 하는 시간을 비워둔 듯 하다. 모든 일과는 밤10시나 돼야 끝난 것으로 보인다.

곡부서당 안쪽에 남아 있는 병풍.곡부서당 안쪽에 남아 있는 병풍.

신명의숙 터.신명의숙 터.

 

 

조선말기에는 이곳에 함양박씨들이 몰려들어 유교적 사상을 전승하는 서당을 세우기도 했는데, 아직도 사설교육기관인 신명의숙 터와 곡부서당 자리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신명의숙은 독립운동가 이세영 등 10여명이 모여 유학과 신학문까지 두루 가르쳤다. 하지만, 일제가 부여공립보통학교를 설립하면서 문을 연지 3년 만인 1911년에 폐교됐다.

 

이 마을이 곡부인 이유는 공자의 고향인 중국 산둥성 곡부와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매화낙지의 영향으로 이주한 이들과 더불어 품격이 높은 이들로 거주하는 마을이라 교육에 대한 열의가 높았을 것으로 보인다.

 

30여년 전까지 운영됐었던 곡부서당은 심하진 선생에 의해 난석서실(蘭石書室)로 운영돼다가 곡부서실, 곡부서당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성백효 해동경사연구소장과 김신호 전 성균관 한림원장 등이 이 서당 출신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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