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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25 전란, 부여에 그가 왔었다-야산上
    러블리인문학 2018. 3. 20. 00:10

    야산이달선생강역사적비▲ 야산이달선생강역사적비

     

     

    금성산과 남영공원을 잇고 있는 계백문. 지맥잇기 사업으로 세워진 계백문 끝에 큰 거북이가 기단으로 있는 비석이 있다. 비석에는 야산이달선생강역사적비(也山李達先生講易事績碑)’라고 쓰여져 있다. 난세의 사상가인 이달 선생의 공적비이다.

      

    야산 선생은 조선 말1889년에 태어나 한국전쟁을 치르고 난 몇 해 후인 1958년 생을 마치기까지 신화를 일군 주역의 대가다. 젊은 시절에는 세상을 떠돌며 미친 척을 하던 그는 주역뿐 아니라, ‘도교불교’, ‘제자백가까지 섭렵했던 도학의 대가다.

     

    경북 김천 출신인 그의 공덕비가 충남 부여에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피난민 300세대를 이끌다>

    우리 민족이 해방을 맞은 후 야산 선생은 대둔산에 들어가 108명의 제자를 키웠다고 한다.

    그리고 1948년 야산선생이 곧 전쟁이 벌어질 것을 예견했다.

     

    그리고, 대둔산을 내려와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에서 300세대를 이끌고 지금의 태안군 안면도로 향한다. 당시 한 가구 인원은 대여섯 명씩 됐기 때문에 최소 2천여 명이 훌쩍 넘었을 것임에도 그의 통찰력을 믿고 많은 이들이 봇짐을 꾸려 따라나섰다.

     

    야산선생은 안면도(安眠島)를 안민도(安民島)라고 불렀다. 백성이 편안하게 있을 곳이라는 뜻으로 면이라는 글자의 눈목 자를 빼고 백성민 자를 사용했다고 한다.

     

     

    <부여를 향하여>

    야산선생은 전란 중이던 1951년 정월. 100여 세대도 되지 않은 이들을 끌고 부여로 내려온다.

     

    그가 부여행을 결정했을 때 제자들은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고했다. 그러나 야산선생은 수원 이남으로 내려오지 못할 것이라고 예견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내려온 곳이 바로 은산면 가곡리 곡부마을이다. 매화낙지 명승지지인 그곳에 자리를 잡았는데, 이곳은 삼실지지(三室之地)’이기 때문. 고부실(곡부), 옥가실, 닭바실(거전리)를 두고 삼실지지라 하는데, 이들은 전쟁에서 전혀 피해를 입지 않은 지역이기도 하다.

     

    야산은 부여에 도착해 비석을 세우기도 했는데, 자신이 글을 쓰고, 제자들에게 손수 그 비석을 직접 쪼도록 해 참여시켰다고 한.

     

    단황척강지위(檀皇陟降之位)’

     

    단군이 하늘과 땅을 오르내린다는 단황척강의 위패를 비석으로 만들어 부여에 세운 것이다. 그 의미는 나라가 대부여인 고조선에서 시작돼, 북부여, 마지막에 성왕이 사비로 천도하며 국호를 남부여로 정한 것이 고조선의 맥을 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비가 매몰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야산이달선생이 세운 홍양학회 회원들의 사적비 참여명단▲야산이달선생이 세운 홍양학회 회원들의 사적비 참여명단

     

    <여제자를 육성하다-삼일학원>

     

    야산선생은 1951년 고부실에 자리를 잡고, 그해 봄에 지역유지였던 유치돈(兪致敦)옹의 배려로 성주산 중턱에 삼일학원을 세우게 된다.

     

    삼일학원은 총 64명의 제자를 양성했는데, 이중에는 여제자가 여럿 있었다고 한다. 당시 여자가 학문을 배우는 부분에 대해 마땅치 못한 인식이 많이 남아있었음을 고려해볼 때, 파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한 일화가 남아 있는데, 한 제자가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데, 여자에게 주역을 가르쳐서야 되겠느냐고 묻자, 야산 선생이 물은 반쯤 채우면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지만, 가득 채우면 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자는 한 등 높게 가르쳐야 한다고 설명하며 조선이 망한 것이 여자에게 학문을 가르치지 않아서라고 당위성을 역설했다.

     

    주역의 대가라는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그 시절 그 시대의 야산 선생의 선견지명과 사상은 지금도 전율을 동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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