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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난세의 사상가 ‘야산 이달’ - 下
    러블리인문학 2018. 3. 26. 23:25

    난세의 사상가인 야산 이달(也山 李達). 그를 본 후손의 시각은 어떨까? 손주인 사단법인 한국홍역문화원 이응국 대표가 지난 2017년 2월, 야산 선생의 평전을 써냈다. 그는 야산 선생의 손주이면서 주역의 제자이기도 하다.

     

    물론, 그는 야산 선생의 가르침을 직접 듣지 못했다. 다만, 현존 주역의 대가이며 야산 선생의 제자인 ‘대산 김석진’ 선생, 역사학자 이이화 등으로부터 가르침을 이어받았다. 그러면서 제자들이 모여 앉아 추억하던 스승 ‘야산’의 이야기를 귀동냥으로 듣고 자랐다. 그리고, 여러 고증을 거쳐 조부의 일대기에 대해 서술했다.

     

    대전의 한 작은 커피숍에서 만난 이응국 대표는 “야산 선생을 이야기하려면 주역을 한 번이라도 읽어야 이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야산 선생이 살아온 일화를 여러 가지 소개했다.

     

     

    이응국 대표야산 이달 선생의 손자인 한국홍역문화원 이응국 대표.

     

    <야산 선생이 부여에 정착한 까닭>

     

    야산 선생이 전쟁 중에 안면도에서 부여로 다시 이주해 처음 한 일이 ‘단황척강지위(檀皇陟降之位)’라는 글씨를 새긴 비석을 세웠다는 것이다.

     

    “부여(扶餘)라는 이름이 생긴 유례에 그 비밀이 담겨있습니다. 사실 성왕이 웅진에서 사비로 백제를 천도하면서 국호를 백제에서 ‘남부여’로 바꿨습니다.”

     

    이 대표가 전한 논리는 고조선 이후 생겨난 한민족의 뿌리인 ‘부여’다. 본래 ‘부여’는 ‘북부여’, ‘대부여’라고 칭하기도 했는데, 고구려와 백제의 뿌리다. 부여에서 민족의 혼을 살리고자 했던 것이다.

     

    부여가 더욱 중요한 부분의 근저에는 야산 선생의 선천과 후천에 대한 이론이 있었다. 야산 선생은 1948년부터 후천시대가 시작됐고, 하늘이 아닌, 땅의 시대이며, 남성보다 여성이 우위에 있고, 왕보다는 백성이 중요시되는 시대가 시작됐다는 이론을 내세웠다.

    또 다른 이유도 존재하는데, 지금도 한반도 정세에 논란을 일으키는 ‘신사참배’와 관련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부여에 가장 큰 신궁을 세우려 했었습니다. 일본인들은 백제를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부여를 높이 평가했었습니다.”

     

    부여가 민족의 혼을 깨우는 곳이라고 생각한 야산 선생은 부여 정착 당시부터 현재 제자들에 이르기까지 금성산에서 개천제를 지내왔었다. 그는 여러 사정으로 인해 부여에서 개천제를 지내지 못하는 아쉬움을 보이기도 했다.

     

    <야산, 난세에 백성을 돌보다>

     

    야산 이달 선생야산 이달 선생

    야산 선생에게 많은 제자들이 있었고, 피난길에 300세대나 그를 따라나섰던 것은 그의 선견지명에 앞서 일제강점기에 백성을 보호하는데 앞장섰던 덕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야산 선생은 ‘광산주’로 삶을 살기도 했다. 그 배경과 과정에서 그가 백성을 일본인들의 핍박 속에서 보호했다는 증거가 나온다.

    “야산 선생이 대구에 가보니, 일본인들은 양지바른 곳에서 살고 있고, 조선인들은 음습한 곳에서 살고 있던 것을 보게 됐어요. 그래서 야산 선생이 ‘이래선 안 되겠다’며 주역을 활용해 ‘미도’에 손을 댔어요. 지금 말로 하면 주식이지요. 그래서 돈을 많이 벌어 광산을 사들이고,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과 대등한 관계를 맺고, 지역에 있는 조선인들을 구제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보태는 데에 돈을 썼죠.”

     

    많은 이들이 그와 함께 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자신의 이득을 취하지 않아서다. 오직 끼니만 해결하면 모두 나눠주는 성품 때문이었는데, 자신의 가족들에게 아버지로썬 꼴찌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치를 내다본 현자였다.

     

    자신은 광산주 노릇을 하며 지역민들을 먹여 살리면서도 가정은 돌보지 않았다고 한다. 하루는 큰 아들이 야산 선생을 찾아 갔는데, 인사를 올리기도 전에 뺨부터 맞았다. 이를 본 제자들은 딱한 생각에 조금씩 돈을 걷어 큰 아들의 품속에 넣어줬는데, 그 돈이 150원이나 됐다. 당시 10원은 논 200평을 살 수 있는 가치가 있었다. 돈을 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 돈을 받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미운 자식에게는 떡 하나 더 주고, 예쁜 자식에게는 매 한 대 더 친다는 말이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미래의 은인에게 절을 하다>

     

    야산 선생이 강경에 갔던 어느 날. 한 사람이 중학생인 아들의 손을 잡고 부여에서 강경까지 나와 만나게 됐다. 그 중학생은 곧 야산에게 절을 올렸다. 그런데, 야산이 느닷없이 중학생에게 맞절을 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제자들이 절을 해도 받기만 하던 야산이 갑자기 맞절을 하는 모습에 제자들이 “스승님 왜 맞절을 하셨습니까?”하고 물으니, 야산 선생이 “내가 언젠가는 이 학생에게 신세질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30여년이 지나서 그 중학생을 부여에서 만나게 됐다. 중학생은 어느 덧 유명대학을 졸업하고 정계에서 나랏일을 거들다가 귀향해 산지기를 하며 여생을 보냈는데, 그가 들어온 곳이 부여읍 용전리, 야산 선생의 묘 인근이었다.

     

    왼쪽에서 두 번째 안경쓴 이가 야산 이달 선생이다.왼쪽에서 두 번째 안경쓴 이가 야산 이달 선생이다. 사진:사단법인 동방문화진흥원 홈페이지

     

    “미리 묘를 잡아 놓은 것도 아니고, 당신이 그곳에 들어갈 것을 점한 것도 아닌데... 야산 선생의 제자 풍월 선생 등이 전국을 다니며 알아보다가 지금의 자리에 혈(穴)을 찾아 안치하게 됐어요. 그런데, 신세질 것을 미리 알았던 거죠. 신기한 일이죠.”

     

    지금 이 글을 읽는 이들 중에서 야산을 아는 이는 몇 명 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아예 없을 수도 있다. 그래도 부여의 많은 사람들이 아직 야산 선생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를 따라 정착한 부여가 이들의 삶의 터전이 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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