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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제문화제, 그 시원(始原)을 얘기하다
    러블리부여인 2017. 9. 20. 00:13

    1회부터 참여한 산증인 임병고 백제사적연구회장


     새까만 교모에 하얀색 체육복을 입고 백마강변에 나섰던 때가 벌써 50년을 훌쩍 지났다. 그때 그 고등학생의 짧은 밤톨머리, 훤히 보이던 이마엔 세월의 흔적이 깊은 주름으로 새겨졌다. 전 부여문화원장을 지내고 현재 백제사적연구회 회장으로 있는 임병고 씨는 올해 맞는 백제문화제에 만감이 교차한다. 


     1955년 고등학생 신분으로 제1회 백제대제에 참여했던 당시를, 그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TV도 없고 라디오도 귀하던 그 시절. 부여에서 백제대제를 지낸다는 소식이 퍼지면 인근 공주, 논산, 보령, 서천 등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당시엔 부여군민이 19만여 명이 넘던 시기였다. 그나마 이 먼 거리까지 오던 사람들은 지인이라도 있어야 머물다 갈 수 있었다. 수 십리 길을 걸어서 와야 했던 시대적 상황이 느껴졌다.


    “백마강에서 행사가 벌어지면 도저히 일어설 수가 없었어요. 한 번 자리를 잡으면 옮길 수가 없을 정도로 북적거렸고,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부소산을 덮다시피 했었거든요.” 


     임 회장은 그때 백제대제가 굉장한 행사였다고 회상했다. 매년 백제문화제가 다가올 때면 그의 눈에는 그 때의 광경이 눈에 선하다. 


    “제1회 백제대제(현 백제문화제)는 관의 개입 없이 오로지 민간의 주도로, 백제 고도인 부여에서 백제 대제를 지내야한다는 부여주민들의 여론이 합쳐져 시작됐어요.”


                                                                                                            ▲삼충제


     부여는 백제대제를 지내기로 했지만 지금처럼 지원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부족한 부분이 많았지만, 사물놀이패가 시장을 돌면 지역민들이 십시일반 조금씩 걷어 행사비를 준비했다. 그리고 모자라는 부분은 지역의 유지들이 힘을 보탰다. 아무리 참여를 한들 예산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때문에 삼충제를 지내는데 마땅한 제각이 없어 지금의 삼충사 광장에 천막으로 제단을 만들어 치르기도 했다.


     당시엔 삼충신 위패가 의열사 사당에 모셔져 있었다고 한다. 그 삼충신의 신위를 부소산 제단까지 옮겨오는 작업에 고등학생들이 동원됐다. 제사를 지낸다고는 했지만 제례의상이 없다보니 학생들은 모두 새까만 교모를 쓰고 하얀 체육복을 입었다. 

     

     영여는 성충, 흥수, 계백을 따로 하나씩 나갔다. 학생들은 무명으로 줄을 만들어 영여 사이에 간격을 두고 앞뒤로 걸었다. 그 뒤로 다른 학생들과 어르신들이 따라 걸으며 많은 인파가 위패봉안 행렬에 참여했다고 한다. 그렇게 삼충사 제단에 신위를 옮기고 부여지역 어르신들은 제관이 돼 엄숙하게 제례를 지냈다. 임병고 회장도 영여 행렬에 참여했던 고등학생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 


     “친구네 집이 부여에서 목욕탕을 했는데, 백제대제를 치룰 무렵이면 목욕탕이 돈을 번다는 소문도 있었어요. 누가 선동한 것도 아닌데 부여 사람들이 대제를 모실 때가 되면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행사에 참여해야한다는 의식을 가졌다는 거죠.”


                                                                                                         ▲수륙대재


     백제문화제는 이러한 제불전이 기원이다. 명절에도 차례상을 보기 전에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고, 부정이 오지 못하도록 액을 막는 예식을 해왔다. 지금도 지역 곳곳에서 치러지는 각종 제례에는 조라술을 담그고, 제례음식을 준비하는 이들은 문밖출입을 하지 않는다. 또, 이를 준비하는 이들의 집에는 모두 새끼로 꼰 액막이를 걸어놓는다.


     임 회장은 우리가 몰랐던 백제대제 초기의 풍경을 소개하기도 했다. 백제대제 시기가 오면 부여읍 주민들은 난데없이 손님맞이에 바빴다. 당시 인심이란 손님이 오면 식사와 취침은 반드시 제공해주는 것이었다. 때문에 부여읍에서 멀리 떨어진 면지역이나 타 지역에서 손님이 들면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유숙을 할 손님들이 쌀과 간식을 꾸려오던 모습도 참 정겨웠단다.


     백제대제는 지금처럼 부대행사가 많지 않았었다고 한다. 초기에는 남영공원에 있던 육일정에서 국궁대회를 치루고 부소산입구에 그네를 뛰고 놀았다. 마지막 날에는 백마강에 의식에 알맞게 치장한 나룻배를 띄워 세상을 떠난 삼천여 백제 여인들의 넋을 건지는 위령제를 지냈다. 승무와 함께 여인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의식도 함께 했다. 


     백제대제는 해가 거듭되며 제와 문화예술행사가 더 해져 규모는 커져만 갔다. 그러면서 1962년 부여군이 예산을 지원하기 시작했고, 관 주도가 시작됐다. 이어 백제문화제집행위원장을 충남도지사가 맡는가 하면 행사 예산을 부여군과 충청남도가 지원했다.

     

                                                                                                       ▲백제대왕제


     공부를 마치고 다시 귀향한 임 회장은 백제문화제 위원으로 직접 참여했다. 그 때가 1965년이었다. 그의 기억에는 이 해에 박정희 대통령이 백제대제에 참석했다. 그는 지역축제인 백제대제의 성공으로 해마다 제례행사와 예술행사가 늘어났다며 그때 시작한 대표적인 것이 당시엔 부소산 영일루에서 제를 지내던 백제대왕제라고 덧붙였다. 


     그런 과정 속에서 1965년 ‘백제대제’라는 이름도 ‘백제문화제’로 변경되는가 하면 1966년에는 공주도 백제문화제를 개최하게 되는 변화를 겪게 됐다. 제12회 백제문화제부터 공주가 함께 시작하게 된 것. 그는 공주의 백제문화제는 제1회가 아니라 시작부터 제12회가 된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했다. 이후엔 여러 가지문제로 부여와 공주가 백제문화제를 격년제로 실시하기도 했다.


                                                                                                            ▲팔충제


    “부여는 백제의 마지막이예요. 백제문화제의 시작도 전통도 제례인데 격년으로 제를 지내는 건 말이 되지 않죠. 그래서 지역민들은 백제문화제를 부여에서 지내지 않더라도 제례만은 거르지 않고 63년간 매년 봉행해왔어요.”


     그는 백제문화제는 지나치게 새로운 종목을 발굴해 봉행하는 것보다는 전통성 있는 몇 가지를 선별해 행사의 질과 가치에 안목을 둬 발전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종목의 가짓수보다는 지역주민과 관광객이 그 행사의 충분한 가치와 재미, 본질을 느끼고 동참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궁녀제


     “부여는 백제라는 멸망한 나라의 도읍지였기에 처절한 일들이 많은 곳이에요. 때문에 제례가 많다는 것이 백제문화제의 특징이죠. 백제의 후예를 자처하고 자부심을 갖고 사는 부여의 주민들이라면 앞으로도 본질을 흐리지 않고, 가치 있는 문화제로 만들기 위해 노력할거라 믿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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