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블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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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산리고분군 유일의 벽화를 만나다러블리백제 2018. 11. 27. 00:32
남부여(南扶餘). 사비백제. 아직 왕릉이 발굴되지 않은 삼국시대의 삼국 중 한 곳. 능산리고분군은 사실 왕릉으로 확인되지 않은 곳이다. 이 능에서는 금제 이식, 금제장식구, 금사, 금동제관장식, 금은제허리띠 같은 것들이 발굴됐는데 왕의 무덤이라기 보다는 왕족으로 추정되는 고관대작의 무덤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능산리고분군. @출처 : 백제 사비성의 부활. 이 시대에도 풍수학적 견해로 무덤을 썼다면 능산리고분군은 형제들의 묘가 아닐까 한다. 7호분이 맡형, 4, 5, 6, 3, 2, 1호분의 순서가 아닐까 싶다. 이중 5호와 6호는 가까이 붙어있고, 4호는 5호의 서남쪽 방향에 멀찌감치 떨어져 있기에 형제로 추정키도 어렵다. 1호분은 동하총이라 불리는데 이곳은 유일하게 벽화가 그려져 있다. 묘실 벽 네 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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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이 풍부한 무진암러블리백제 2018. 10. 26. 15:54
외산면 무량사 근처에 자리잡은 무진암은비구니 암자로 햇빛이 풍부하고 보석처럼 반짝이는 예쁜 절이다.무진암은 매월당이 무량사에 입적하고 묘탑(부도)을 모시며그 옆에 부도암이라는 암자를 지었는데, 세월이 지나 1530년 경 보현사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임진왜란에 불에 타 사라지고 터만 남았다고 한다.이후 1960년 경 박진우 스님이 암자를 중건하고, 수덕사에 입적한 주지 혜암스님이 무진암이라고 명명하셨다고 전해진다. 석조약사여래좌상.약합을 들고 있는 커다란 모습이 절로 병을 낫게 해줄 것만 같아 찾는 이들의 마음에 평온을 더해 주고 있다. 무량사에서 있었던 삼성각 또한 무진암에서도 볼 수 있다. 무진암을 드나드는 길목에는 무량사김시습부도를 볼 수 있다. 부도는 스님들의 사리를 봉안한 시설이다. 사리는 무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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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지키는 영험한, 주암리 은행나무러블리백제 2018. 9. 30. 12:00
마을을 지키는 영험한, 주암리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제320호로 지정된 이 주암리 은행나무는 백제의 26대 왕인 성왕 16년 사비천도 무렵, 조정 좌편 맹씨가 심었다고 전해진다. 이 마을은 백제가 망할 때와 신라, 고려가 망할 때 3회에 걸쳐 인가가 전멸되는 난리를 치루었다. 때문에 이 은행나무도 난리 때마다 칡넝쿨에 감기는 재난을 겪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외에도 고려시대 숭각사의 주지가 암자를 중수할 때 대들보로 쓰기 위해 주암리 은행나무의 큰 가지 하나를 베어가다가 갑자기 죽었으며, 사찰도 망해버렸다는 설도 전해진다. 1894년에는 바람도 불지 않는 날에 갑자기 동편으로 뻗은 가지가 부러져 마을 사람들이 불길한 징조라 여겼는데, 이해에 동학난이 일어났다. 1906년에는 서쪽으로 뻗은 가지가 부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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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래가 전해지지 않은 비밀스런 동남리사지러블리백제 2018. 9. 29. 18:00
유래가 전해지지 않은 비밀스런 동남리사지 1984년 7월 26일 충청남도기념물 제50호로 지정된 동남리 유적지는 부여읍 동남리 211-1번지 일대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의 동남쪽에는 군수리사지와 궁남지가 보이며 소쪽으로는 부여나성이 있다. 동남리사지는 절의 이름이나 유래가 전해지지 않은 백지시대의 폐사지로, 1938년 일본인 이시다에 의해 절터가 일부가 발굴, 조사 돼 알려져 왔던 유적이다. 이곳은 1993년~1994년에 걸쳐 충남대학교 박물관에서 전면조사를 실시했다. 이후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일제시대의 발굴결과와 일부 차이를 발견했다고 한다. 이곳은 일제시대에 발굴이 이루어졌을때에는 강당, 금당과 회랑을 갖추고 있으나 탑지가 없는 특이한 건물로 알려져 있었다. 일제시대 조사 때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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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철폐령 후 복원된, 부산서원러블리백제 2018. 9. 29. 12:15
서원철폐령 후 복원된, 부산서원 부여 규암면 진변리에 위치한 부산서원은 조선 인조·효종년간에 학계와 정계에서 크게 활용한 신독재 김집과 백강 이경여의 위패를 모신 서원이다. 서원은 1719년(숙종 45)에 이 지역 유림들의 공론에 의해 창건됐다.본 서원은 창건된 바로 그 해에 국왕으로부터 부산서원이라 사액을 받았다. 이 서원에 배향된 김집과 이경여는 학문과 도덕은 물론, 당시 17세기의 시대적 과제를 해결함에 있어 지도적 위치에 있던 인물들이었다고 전해진다. 신독재 김집이 부산서원에 배향된 직접적 계기는 그가 일찍이 부여현감을 역임한 인연에서 비롯됐다고 한다.그는 읍치를 잘하여 교화가 두루 미치게 함으로써 읍에서 쟁송이 그쳤고 그 자신은 날마다 읍중의 자제와 더불어 강론하기를 그치지 아니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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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신을 알리고자 지어진 '의열사'러블리백제 2018. 9. 28. 01:33
충신을 알리고자 지어진 '의열사' 1984년 05월 17일 충남문화재자료 제114호로 지정된 의열사를 찾았다. 부여 의열사는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산3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1575년(선조 8년) 부여 현감이었던 홍가신이 백제 때 충신 성충과 흥수, 계백 고려 말기의 충신 이존오의 충의가 후세에 전해지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 해 건립한 것이다. 사우 입구에는 한벌대의 장대석 기단 위에 원형초석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운 후 굴도리 계통으로 처리한 소슬 삼문형의 외삼문이 세워져 있다. 이 삼문을 들어서면 다시 6단의 계단으로 오르도록 한 둘째단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평면으로 구성된 사우가 건립되어 있다. 측면 3칸중 전면 1칸은 개방하여 전퇴로 만들었고 나머지 2칸은 통칸으로 하여 6인의 위패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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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뿌리 내린 백제의 장수 ‘억례복류’러블리백제 2018. 8. 25. 14:23
백제문화제의 개막 전날. 부여군 충화면 팔충리에 위치한 팔충사에서는 장군인 달솔과 좌평, 대승 여덞에 대한 제를 올린다. 이중에 ‘억례복류’는 계백과 동기로 전해지는 장군 달솔(達率)이다. 그가 근초고왕의 후손이라고 전해지는 건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 기록돼 있다고 한다. ‘억례복류’는 몇 해 전 세계유산인 부여나성을 발굴하면서 학술대회에서 재조명 됐다. 그가 부여나성 연구에서 재조명된 이유는 백제부흥군으로 활동하다가 일본으로 망명한 뒤의 기록 때문이다. 억례복류가 오노성(대야성,大野城)과 기성(연성, 椽城)을 축조한 관계가 전해졌다. 이 축조기법이 백제시대의 것과 동일했기 때문이다. 이 성은 백제가 멸망한 몇 해 뒤인 665년에 축조됐다. 그리고 671년 대산하(大山下) 작위를 받았다. 억례복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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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일왕 부여를 탐내다러블리백제 2018. 8. 24. 21:46
일제강점기. 일본은 신궁을 지을 위치로 한반도 중에서 부여를 택했다. 1939년 7월 31일. 일본 일왕은 라디오를 통해 직접 신궁공사를 발표하기도 했다. 특히, 충남도청을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하는 비용보다 8만원이 많은 총 24만원이 투입된 대규모 공사였다. 일본 이세이에 있는 신궁과 동일한 규모로 지으려 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하필 왜 ‘부여’에 신궁을 건립하려 했을까? 신궁을 건립하던 위치는 부소산성 내 ‘삼충사’가 서 있는 곳이다. 위치적으로 아주 중요한 곳이라는 판단이다. 삼충사 경내에서 도심이 훤히 바라다 보이고, 북서쪽에서 휘돌아 내려온 금강이 부소산을 거쳐 큰 들판을 지나 남쪽으로 흘러내려가고 있는 형상이다. 부여여고 앞 주유소 뒤로 이어진 남령공원 산맥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금은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