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블리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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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조상 왕신러블리인문학 2018. 12. 24. 19:30
부여에서 '왕신'은 올바른 죽음을 겪지 못한 집안 내의 귀신이다. 때문에 흔히 조상이 되지 못한 귀신이라고 한다. 어떤 집안의 특수한 사정과 관련된 신이다. 왕신은 모시기가 매우 까다롭고 힘들다는 공통성을 지닌다고 한다. 기왕에 섬기려면 잘 해야지, 까닥 잘못하면 집안 식구 하나 죽어나가기 십상일 정도로 무섭다고 전해진다. 왕신단지를 장광에 모셨다면, 특별한 일이 없이 그 부근으로 가는 것조차 마음에 걸려하는 수준이다. 집안에 왕신단지를 모셨다면, 다른 집안의 신령보다도 모든 일에 걸쳐 제일 먼저 신경을 써야 한다. 가령 집 바깥에서 조그만 물건이나 음식이라도 들어오면 먼저 왕신에게 바친 후 사용해야 한다. 집안에서 별식을 마련해도 그렇다. 집안에 새색시가 처음 들어와도 왕신에게 폐백을 드려야 하고,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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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의 독특한 문학예술러블리인문학 2018. 11. 30. 16:34
부여는 역사적으로 찬란한 예술문화를 가지고 있다.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로서 망국의 슬픈 한과, 뜨거웠던 예술의 꽃을 피운 곳이다. 부여에서 그간 출토된 유물들은 심미적인 측면으로 볼 때 섬세함과 화려함을 그 특징으로 꼽기도 한다. 고구려의 유물들은 상대적으로 남성에 비유하고 백제의 유물을 여성에 비유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인간은 감정과 이성을 갖고 태어난다. 뿌리를 내린 곳의 지리적인 특성과, 문화적인 환경이 한 인간의 예술성을 발전, 쇠퇴시킨다. 부여의 지리적인 특징이라 하면 금강하류의 드 넒은 늪지대와 아름다운 산하이다. 호남과는 물리적 거리도 가깝기 때문에 교류 또한 빈번했다. 이 같은 특징은 이 고장 사람들의 예술혼과 무관하지 않다. 부여만의 독특한 감성을 키워내어 지역적 특징과 더불어 많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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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을 지켜주는 부여의 '가정신앙'러블리인문학 2018. 11. 29. 19:00
1960∼1970년대 부여지역은 가정신앙으로, 대개 음력 정월과 시월에는 집집마다 독경쟁이를 불러다 안택(365일 재수대통하라는 의미로 음력 정월 혹은 시월에 날을 잡아하는 재수굿)을 했다. 이때 집을 짓고 지키며 집안의 모든 일이 잘되도록 관장하는 집안의 최고 신 성주(城主)를 처음이자 대표로 삼아 집안의 여러 신령들을 정성껏 받들어 모셨다. 또, 음력 정월과 시월에는 ‘보름떡’, ‘가을떡’이라 부르는 떡시루를 정성껏 마련해 집안의 안주인이 집안의 여러 신령들을 위했다. 특히 정월에는 요왕제와 서낭제, 거리제 등을 많이 지냈다고 전해진다. 평소에는 당산과 칠성을 가장 많이 위했다. 조왕은 음력 정초에 풍물굿을 칠 때나 안택굿을 할시루떡을 할 때 위하지만, 조왕보다는 당산에 더욱 정성을 들였다. 삼신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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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산 금공리 '장승제'러블리인문학 2018. 11. 29. 17:00
은산면 금공리에는 예로부터 산제와 벼락바우제, 장승제, 서낭제, 둥구나무제 등 다양한 마을의 공동제사가 있었다. 그러나 시대가지나면서 다른 제의는 없어지고 산제와 장승제만 이어지고 있다. 이중 장승제는 산제를 지낸 후에 이어지는 제다. 예전에는 산제를 지내고 벼락바우제를 지낸 후 장승제를 지냈다. 벼락바우제는 마을의 한가운데에 있는 벼락바우에 들어가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원래 장승제는 새벽에 진행됐지만, 벼락바우제가 소멸되면서 산제가 끝난 자정무렵 곧바로 지낸다. 예전에는 음력 정월 초하루나 초 이튿날에 마을 사람들 모두가 인근에 장승나무를 베러 갔다. 그러나 현재는 장승제 당일인 음력 정월 초 사흗날에 장승목을 베러간다고 한다. 이 때는 반드시 손 없는 곳으로 가서 소나무와 참나루를 각각 한그루 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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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에서는 기우제를 어떻게 지냈을까?러블리인문학 2018. 11. 25. 16:00
기우제는 가뭄이 계속되면서 농작물의 파종이나 성장에 해가 있을 때 비를 내리기를 기원하는 제다. 농업을 기반으로 생활하는 우리 나라에서는 기우제의 경우 세시풍속처럼 일정한 시기에 지내는 것이 아니라 가뭄이 계속될때 부정기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비가 내릴 때까지 반복적으로 지내는 제로 다른 제와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참여하는 이가 많을 수록 효험이 있다고 전해지며 다양한 형식을 갖는다. 부여지역에서는 기우제가 아닌 '비우제'로 부르기도 했다. 간혹 물제, 무제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비우제'라는 용어가 가장 많이 쓰여졌다고 전해진다. 이곳의 기우제는 마을의 여자들이 중심이 됐다. 집집마다 한 사람 이상의 여성이 참여해 인근 지역으로 물을 받으러 갔다. 대개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는 강이나 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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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의 4개 향교는 어디일까?러블리인문학 2018. 11. 25. 13:56
향교는 고려와 조선에 있었던 지금으로 말하면 지방의 학교라 할 수 있다. 서기 1127년(인종 5)에 지방 제주에 학(學)을 세워 널리 도(道)를 가르치라는 왕의 명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고을의 규모에 따라 학생 정원이 다르고, 기본 재원에 따라 학전(學田)이 지급됐다. 또한, 수령은 향교 생도의 독서와 일과를 매월 관찰사에 보고했으며, 수령의 치적을 평가하는 데 있어 향학(鄕學) 진흥에 큰 비중을 두었다. 후일 향교는 제사의 기능이 강화된 반면 교학의 기능은 약화돼 서원 발흥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 초하루·보름에 분향하고 있다. 조선시대 부여지방에는 임천군을 비롯하여 부여·홍산·석성의 네 개의 군현이 설치돼 이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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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산면 마을의 유래러블리인문학 2018. 11. 16. 18:06
천보리(天寶里) 천보리는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피난처로, 광산김씨와 평산신씨 등이 이주하여 설촌하였다고 전해진다. 본래 홍산현 대야면의 지역이었다가 1914년 군폐합에 따라 신기리·늑동리와 무량리 일부를 병합해 내산면에 편입됐다. 이후 천보산의 이름을 따서 천보리라 명해 현재에 이르렀다. 그후 상륵·하륵·신기의 3개 마을로 구분됐다. 상륵마을은 지세가 말이 굴레를 벗는 형국이라 해 상륵이라 하고, 하륵마을과 함께 늑동리로 변했다가 천보리로 편입돼 현재에 이른다. 마을 뒷산에 반개절이라는 사찰이 있었으나 약 100여년 전에 없어졌다는 절터가 있다. 하륵마을은 아랫구레울이라 하여 하륵이라 칭했다. 마을입구에 소류지가 있어 10여 ha의 경지에 몽리하고 있다. 신기마을은 새로이 촌락을 이루었다 해서 옛 이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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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현의 토착세력은 어떤 성 씨일까?러블리인문학 2018. 10. 26. 14:58
부여현의 토성은 심 씨, 이 씨, 서 씨, 전 씨, 형 씨, 조 씨, 고 씨, 표 씨 등 8개 성씨다.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차이가 없는데, 이는 여말선초에 이르는 시기에 부여현의 토착세력 판도가 크게 변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속성이 기록되어 있지 않은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속성으로 백 씨가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점은 이 시기의 성씨 변동을 말해주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기록에서 확인되는 대표적인 토착 성씨로는 부여 서 씨가 있다. 부여 서 씨는 『세종실록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토성조에 가장 먼저 기록되고 있을 정도로 부여지역의 대표적인 토성이었다. 그러나 기록상으로는 고려시대의 인물로 부모가 나쁜 병에 걸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