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블리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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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골짜기에 아늑한 마을 외산 가덕리러블리타운 2018. 8. 25. 11:26
월명산 움푹 파인 곳에 가장골(가리점)과 손대, 손사마을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곳이 외산면 가덕리이다. 반교리 안쪽에 자리한 마을이다. 원래 홍산문화권에 속했다. 월명산 고개를 넘어서면 보령시 미산면으로 가는 길이 있다. 이 길은 워낙에 험해서 뱁제고개라 부르기도 한다. 이 마을이 형성된 것은 1700년대 쯤이라고 전해진다. 당시 파평윤씨들이 정착해 지금까지 촌락을 이루고 있다. 월명산 자락은 파평윤씨 가문 소유가 많다. 현재는 이 가문의 선산 자락에 밤나무를 100ha 정도 재배하고 있다. 1980년대 까지만 해도 50여호가 거주했던 마을이다. 지금도 가구 수는 크게 줄지는 않았다. 마을은 월명산 자락에서 내려오는 물길이 만수천까지 이어져 간다. 만수천으로 유입되는 지천 중 하나다. 산자락에서 시작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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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일왕 부여를 탐내다러블리백제 2018. 8. 24. 21:46
일제강점기. 일본은 신궁을 지을 위치로 한반도 중에서 부여를 택했다. 1939년 7월 31일. 일본 일왕은 라디오를 통해 직접 신궁공사를 발표하기도 했다. 특히, 충남도청을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하는 비용보다 8만원이 많은 총 24만원이 투입된 대규모 공사였다. 일본 이세이에 있는 신궁과 동일한 규모로 지으려 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하필 왜 ‘부여’에 신궁을 건립하려 했을까? 신궁을 건립하던 위치는 부소산성 내 ‘삼충사’가 서 있는 곳이다. 위치적으로 아주 중요한 곳이라는 판단이다. 삼충사 경내에서 도심이 훤히 바라다 보이고, 북서쪽에서 휘돌아 내려온 금강이 부소산을 거쳐 큰 들판을 지나 남쪽으로 흘러내려가고 있는 형상이다. 부여여고 앞 주유소 뒤로 이어진 남령공원 산맥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금은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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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불상에는 사랑하는 애인을 향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러블리백제 2018. 8. 15. 21:07
'鄭智遠爲亡妻趙思敬造金像早離三塗' 일제 강점기인 1919년. 부소산성에서 사비루 건립 공사 도중에 8.5cm크기의 작은 불입상이 발견됐다. 이 불상은 참으로 자비롭게 오른손은 치켜들고 있고, 왼손은 내려 모두 손바닥을 내보이고 있었다. @이미지출처 : 백제사비성의부활 오른 손바닥을 올린 것은 '두려워 말라'는 뜻이고, 왼손 바닥을 내려 보인 것은 '소원성취'를 뜻한다. 청동에 수은과 금을 섞어 도금한 이 불상은 또 다른 특이한 점이 있다. 불상의 배경이며, 아우라인 광배 뒷면이다. 서동, 선화처럼 이야기는 길지 않지만 그 마음은 아릴 정도로 깊다. '鄭智遠爲亡妻趙思敬造金像早離三塗' (정지원위망처조사경조금상조리삼도) “정지원이 죽은 아내 조사를 위하여 삼가 금상을 만들어 빨리 삼악도(三惡道)에서 벗어나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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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산(恩山)은 은산(隱山)이었다러블리타운 2017. 9. 12. 00:13
은산면의 중심 소재지인 은산리. 지금은 은혜로울 은(恩)자를 쓰지만, 예전에는 산속에 숨어 있는 마을이라는 숨길 은(隱)자를 썼었다고 한다. 행정구역상 신대리와 함께 중심지를 이루고 있는데, 은산리 산 아래 몇 집만이 있었다고 해서 그렇게 불렸다는 기록이 있다. 은산리는 북서쪽에서 남서쪽으로 흐르고 넓은 평야지대가 있다. 그래서인지 마을은 농경사회를 이뤘던 신석기 때부터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보통 지역이 아닌 것은 주변에 산세가 큰 둘레로 휘감싸 안고 있고, 비옥한 토지까지 펼쳐져 있었다. 특히, 은산면 자체가 골짜기가 이뤄진 대양리와 장벌리 등을 곁에 두고 있어 칠갑산의 산세가 이곳까지 다다르고 있다. 그랬던 만큼 많은 사람들을 모이게 한 장소다. 조선시대에는 관청에서 말을 관리하던 역말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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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으로 새로 그린 샘골마을 '정동리'러블리타운 2017. 9. 5. 00:40
부여읍 정동리는 백마강을 서쪽에 두고 넓은 평야를 두고 있는 마을이다. 북쪽으로는 저석리, 동쪽으로는 가증리와 용정리, 남쪽으로는 쌍북리가 위치해 있다. 지금은 강에 다리가 놓여 합정리에 있는 백제문화단지를 쉽게 갈 수 있지만, 예전에는 규암까지 돌아서 가야 했다. 정동리 한자로 井洞이라 쓰인다. 우물이 있는 동네인데, 마을에 큰 샘이 있어서 이렇게 불렸다는 것이다. 옛 지명으로는 샘골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물과 관련이 깊은 이 동네는 펄밭이기도 했다. 동쪽에 놓은 동산줄기 밑으로 집들이 옹기종기 모였고, 제방이 있기도 전에는 수시로 물이 범람하던 곳이다. 그렇지만 20여년 전만 해도 1,000여명이 살았던 작지 않은 마을이다. 정동 2리 마을 입구에는 큰 아름드리 나무가 몇 그루 서있다. 마을 느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