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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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화암 인근에 ‘낙화생’을 심다-야산 中러블리인문학 2018. 3. 20. 00:14
야산 이달 선생은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나던 해 봄에 피난민과 제자 등 일행들과 함께 부여읍으로 거쳐를 옮긴다. 그리고 지금의 정림사지 오층석탑 주변 구아리와 동남리 일대에 촌락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야산 선생은 일행들이 먹고 살 양식이 부족함에 깊은 고민을 했다. 그가 이 같은 고민을 한 것은 이 때만이 아닌 것이 드러난다. 용정3리 청마산성 아래 위치한 그의 묘소 입구에도 제자들이 세운 비석에 많은 이들을 구제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곳에는 전란 중에 많은 이들의 목숨을 구하고, 생계를 잇게 해준 내용은 나와 있지만, 일제강점기 시절 일화는 기록되지 않았다. 지금은 백마강 주변에 땅콩을 찾아볼 수 없지만, 강 주변 백사장은 수박밭으로 변하기 전까진 땅콩이 자라던 곳이었다. 이 땅콩은 6.25전쟁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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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소산에 자리하고 있는 [고란사]러블리백제 2018. 1. 30. 04:19
부소산에 자리하고 있는 [고란사] 부여 쌍북리 부소산에 자리하고 있는 '고란사'는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98호로 지정됐다.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다. 창건에 대한 기록은 아쉽게도 전해지는 것이 없지만, 전해지는 설로는 백제 때 왕들이 노닐기 위해 건립한 정자라는 것! 또한 궁중의 내불전이었다고도 전해진다. 백제가 멸망할 때 낙화암(落花岩)에서 사라져간 삼천궁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1028년(고려 현종 19)에 지은 사찰이라고도 하는 이 곳은 백마강이 펼쳐지는 주위경관이 그 어느곳에 비길데 없이 아름답다. 절 뒷편에는 고란사의 유명한 약수 고란정이 있다. 약수를 떠오는 사람들이 고란초의 잎을 하나씩 물동이에 띄워 옴으로써 그것이 고란약수라는 것을 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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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포 깃발이 휘날리던 중정리러블리타운 2018. 1. 3. 00:55
부여읍 중정리는 왕포리와 염창리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시내 중심지로부터 동남쪽 부근에 자리를 잡고 나즈막한 언덕에 둘러싸여 큰 금강을 마주하고 있다. 지금은 하구둑과 보로 인해서 범람하는 일이 없지만 비가 많이 내리면 왕포천 제방까지 넘치기도 한다. 몇해 전부터 배수장 사업이 진행돼 침수피해는 한숨 돌렸지만 여전히 왕포천을 따라 서 있는 암벽들까진 위험재해지구다. 중정리는 서쪽으로 왕포리와 경계를 이루고 동쪽으로는 부여나성(동나성) 남쪽 끝자락으로 염창리 사이에 있다. 곡정이와 당리, 동리, 말랑이, 모정, 옷바위, 중리, 창머리, 서낭당 등의 부락이 조성돼 있었다고 전해진다. 마을의 중심은 중리와 구정인 듯 하다. 구정은 아홉개의 우물이라는 뜻의 한자다. 당리는 중리 남서쪽에 있으며 당산이 있어 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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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제러블리인문학 2017. 12. 12. 23:43
궁녀제는 나당연합군에 의한 백제 패망 후, 백제의 여인들이 나라를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 낙화암으로 몸을 던진 그 숭고하고 높은 충절을 추모하는 제의식이다. 이는 삼충제와 마찬가지로 민간 주도로 시작된 1955년 백제대제 1회 때부터 시작됐다. 당시엔 ‘삼천궁녀위령제’로 부소산아래 천막을 쳐 재단을 설치해 진행했다. 현재의 궁녀제의 모습은 부소산 태자골에 1965년 착공, 1966년 준공된 궁녀사와 함께 갖춰졌다고 볼 수 있다. 사당이 준공된 이후에는 지금까지 매년 이곳에서 백제문화제 궁녀제를 봉행하고 있다. 당시 준공식에는 3,000여 명의 군민이 참석해 삼천궁녀 영정 봉안식과 궁녀제를 함께 봉행했다. 궁녀사에 봉안된 삼천궁녀 영정은 부여 은산 출신의 김종팔 화백이 그린 그림이다. 김종팔 화백은 은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