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백장군
-
의열사와 의열비를 만나다.러블리백제 2018. 7. 31. 14:00
의열사와 의열비를 만나다. 1984년 05월 17일 충남문화재자료 제114호로 지정된 의열사를 찾았다. 이곳은 1575년(선조 8년) 부여 현감이었던 홍가신이 백제 때 충신 성충과 흥수, 계백 고려 말기의 충신 이존오의 충의가 후세에 전해지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 해 건립한 것이다. 1577년에 사액되었고, 1641년(인조 19년)과 1675년(숙종 1년)에 각각 중수됐다. 이후 조선 선조 때의 지사인 정택뢰(鄭澤雷), 인조 때의 문신 황일호(黃一皓:1588∼1641)도 함께 배향되었는데, 1866년(고종 3)에 철폐되었다가 그뒤 복원되었다고 한다. 원래는 용정리 망월산에 있던 것을 현재 위치한 남령공원으로 1971년 옮겼다. 의열사를 마주한 오른쪽 한 켠에는 의열사비가 자리하고 있다. 의열사비는 이간이 ..
-
부여의 주산(主山) 금성산을 탐닉하다-①금성산러블리타운 2018. 2. 27. 00:09
부여읍 동남리와 쌍북리, 가탑리, 관북리의 중심에 서 있는 금성산. 부여의 부소산성이 주산(主山)으로 잘못 알고 있지만, 사실은 금성산이다. 금성산은 오산(烏山), 부산(浮山)과 함께 삼령산(三靈山) 중 하나다. 삼령산이라는 이유는 금성산과 오산, 부산에는 신령한 존재들 셋이 살면서 아침과 저녁으로 날아서 오갔다고 하는데, 사비백제 123년 동안 지켜준 이들이라고 하는 전설이 있다. 그 중에 금성산은 일산(日山)이라고 불렸는데, 황산벌에서 패한 계백이 이곳에서 마지막 결전을 치렀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지금 부소산에 있는 반월루(半月)가 금성산에 있었다는 반월성의 이름을 딴 것으로 보인다. 금성산은 10여년 전 지맥잇기 사업으로 계백문이 서 있는 계륵고개(보릿고개)에 큰 문과 흙으로 ..
-
백제오천결사대 충혼제러블리인문학 2017. 12. 26. 23:35
백제오천결사대 충혼제는 백제말 계백장군과 함께 황산벌 전투에서 싸운 무명 오천결사대의 넋을 위령하는 제전의식이다. 부여군재향군인회 주관으로 백제오천결사대 충혼탑에서 봉행되고 있다. 최초의 오천결사대 충혼제는 1990년 9월 27일이다. 660년 7월 9일 황산벌에서 계백 장군과 함께 전사한 백제 무명의 오천결사대를 위해 백제 삼산 중 하나인 오산(현 오석산) 정상에 설치된 제단에서 봉행됐다. 부여읍번영회에 의해 1989년 10월 처음 봉행된 오천결사대 충혼제는 그 해 최초로 백제문화제 제전 종목으로 채택돼 부여읍번영회 주관으로 제향을 올렸다. 이후 2000년에는 구드래 행사장에서 ‘삼국사기’에 기록된 신라 5만 대군에 맞서 싸우는 황산벌 전투 출정에 앞서 계백장군의 결연한 의지를 다지며 처자의 목을 베는..
-
충절의 고장, 충화 천당리러블리타운 2017. 12. 14. 18:56
충화면은 백제시대 말부터 충신들이 대거 배출된 곳이다. 계백장군의 출생지로 알려진 천등산 자락이 휘휘돌아 면소재지를 감싼다. 천당리는 면소재지 지역이다. 아직도 면사무소와 농협, 우체국, 지구대가 자리잡고 충화전체의 행정과 주민들의 안녕을 돌보는 곳이다. 천당리는 조선 고종 32년 행정구역 개편 때 상천리와 중천리, 하천리, 당동리, 하지석리 일부가 병합돼 하천과 당동의 이름에서 가져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 마을은 교촌과 당골, 넘어말, 천등골, 추원골, 표뜸이라는 옛 지명이 전해지고 있다. 백충티 또는 백충재라 불리는 곳은 백제의 충신들이 넘나들던 고개라 이렇게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만물슈퍼. 이런 구멍가게가 몇곳 남았다. 정주인구를 비례했을 땐 적지 않은 숫자다. 이 곳은 이름 그대로 ..
-
부여의 밤 풍경-시가지 주변부러블리타운 2017. 10. 30. 21:32
국화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궁남지는 역시 밤에도 실망이란 게 없다. 운동하는 이들이 많을 정도다. 구드래와는 사뭇 대조적이다. 한 켠에서는 가을 밤 감성을 자극하는 라이브 통기타 가수의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밤에 만난 정림사지 돌담길은 더욱 운치 있다. 저 벤치에 앉아 젊은 남녀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그 모습이 상상되는 아름다움이다. 담벼락을 넘어 손을 한 껏 내민 단풍은 한 낮의 태양볕을 가려주려 했나보다. 낭만의 반대편엔 숙제가 있다. 간판도, 건물 모습도 온전치 않다. 계백장군동상은 논란의 연속이다. 그 논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유는 위기감에서 찾을 수 있다. 사람은 불안감이 엄습하면 미래를 알고자 하는 경향과 함께 미신적인 요소를 찾는다. 종교적 가르침을 찾는 건 상책에 속한다. 계백장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