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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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재된 휴양지 은산 거전리러블리타운 2018. 6. 17. 18:01
비가 내린 뒤 거전리 마을을 동쪽으로 끼고 굽이쳐 흐르는 지천은 부여군민들의 휴양지 중 대표적인 곳이었다. 대표적인 마을은 닥밭실(닭바실/닥바실), 정골, 삼거리가 있다. 이 밖에도 최북단에 양작골, 윗정골, 증건너골, 즘터위새양티골, 지치남골, 주벅이먹골, 한이정골, 큰동네, 도름말리, 구새박골, 안골, 돼지골, 수박골 등 다양한 마을이 있다. 닥밭실은 닥나무를 키우던 밭이 많다는 뜻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지금은 닭바실이라고 표기하지만, 정확히 사용하는 표기법은 아니다. 산악지역으로 계곡이 형성된 거전리는 곳곳에 밭이 무척이나 많다. 계곡마다 흐르는 물은 곳곳에 마을을 형성하기에 너무 좋은 여건처럼 보인다. 빗물에 개울이 깨끗이 떠내려가면 여기저기 바위 근처에서 아이들이 가족과 함께 첨벙대던 동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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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절로도 으뜸, 곡부마을 가곡1리러블리타운 2018. 2. 20. 00:39
가곡1리는 충절로도 으뜸이다. 그중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끈 김좌진의 남자 박영희 장군의 생가가 아직도 남아 있다. 박영희 장군은 조선 말기 좌승지를 지낸 박시순의 손자다. 박영희는 이곳 신명의숙 출신으로 휘문의숙에 진학하여 신학문을 배운 뒤, 신흥무관학교를 나왔다. 북로군정서 학도단장을 맡았고, 1920년 여름 김좌진 장군의 부사령관으로 청산리 전투를 치른 독립군이다. 그는 1925년 신민부 보안사령관을 지냈으나 5년 뒤인 러시아 고루지게에 독립군지원을 요청하러 갔다가 피살당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박영희 장군의 생가에는 조상들의 영당이 있다. 조선 중기 문신인 박경후(朴慶後)의 영정이 있었던 곳이다. 현재 진본은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귀옹 영당이라고도 불리는데 조선 후기 좌승지를 지낸 박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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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모아들이는 힘, 은산리의 기운은 꿈틀거린다러블리타운 2017. 9. 12. 00:24
은산리는 경제적 쇠퇴를 겪은 시골의 여느 중심지처럼 보이지만, 부흥의 기운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백제가 패망하고 부흥군이 모여들었던 곳이 은산리 일대다. 지금의 은산리 지역은 아니겠지만, 경둔리와 대양리, 각대리 지역에 숨어들어 준비를 했을 것으로 본다. 실제로 당나라 군사가 물러간 뒤에 신라가 안정화작업을 하는데 시간이 무척이나 오래 걸렸을 것이고, 백제의 잔여 세력이 모여들어 있었다면 쉽게 접근치 못했을 상황이다. 부흥군은 수년 동안 은산리 일대의 농토를 활용하여 군비를 확충했을 수도 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백제부흥군을 달래는 '은산별신제'로 이어진다. 은산리는 아직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것은 옛부터 내려오는 문화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기운이 쇠락한 듯 싶지만, 다시 꿈틀거리는 기운이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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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산(恩山)은 은산(隱山)이었다러블리타운 2017. 9. 12. 00:13
은산면의 중심 소재지인 은산리. 지금은 은혜로울 은(恩)자를 쓰지만, 예전에는 산속에 숨어 있는 마을이라는 숨길 은(隱)자를 썼었다고 한다. 행정구역상 신대리와 함께 중심지를 이루고 있는데, 은산리 산 아래 몇 집만이 있었다고 해서 그렇게 불렸다는 기록이 있다. 은산리는 북서쪽에서 남서쪽으로 흐르고 넓은 평야지대가 있다. 그래서인지 마을은 농경사회를 이뤘던 신석기 때부터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보통 지역이 아닌 것은 주변에 산세가 큰 둘레로 휘감싸 안고 있고, 비옥한 토지까지 펼쳐져 있었다. 특히, 은산면 자체가 골짜기가 이뤄진 대양리와 장벌리 등을 곁에 두고 있어 칠갑산의 산세가 이곳까지 다다르고 있다. 그랬던 만큼 많은 사람들을 모이게 한 장소다. 조선시대에는 관청에서 말을 관리하던 역말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