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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산면 마을의 유래
    러블리인문학 2018. 11. 16. 18:06

    내산면 지도 / 출처: 부여군지


    천보리(天寶里)

     천보리는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피난처로, 광산김씨와 평산신씨 등이 이주하여 설촌하였다고 전해진다. 본래 홍산현 대야면의 지역이었다가 1914년 군폐합에 따라 신기리·늑동리와 무량리 일부를 병합해 내산면에 편입됐다. 이후 천보산의 이름을 따서 천보리라 명해 현재에 이르렀다. 


     그후 상륵·하륵·신기의 3개 마을로 구분됐다. 상륵마을은 지세가 말이 굴레를 벗는 형국이라 해 상륵이라 하고, 하륵마을과 함께 늑동리로 변했다가 천보리로 편입돼 현재에 이른다. 마을 뒷산에 반개절이라는 사찰이 있었으나 약 100여년 전에 없어졌다는 절터가 있다. 하륵마을은 아랫구레울이라 하여 하륵이라 칭했다. 


     마을입구에 소류지가 있어 10여 ha의 경지에 몽리하고 있다. 신기마을은 새로이 촌락을 이루었다 해서 옛 이름을 새터라 했으며, 그후 신기라 불렀다. 


    묘원리(妙院里)

     묘원리는 1100년경 광산김씨와 창녕조씨가 각각 이주해 설촌하였다고 전해진다. 본래는 홍산현 지역이었는데 1914년 군폐합에 따라 묘원리와 산저리(山底里), 만자리(晩者里) 일부를 합해 묘원리가 됐다.


     묘원마을은 조선시대 행인의 편의를 돌봐주는 묘원이 있어 묘원리라 불리다가 이를 줄여 원곡(院谷) 또는 면동(面洞)이라 했다. 산저마을은 '안터'라는 마을과 '황새말'이라는 두 마을로 이루어졌다. (묘원 마을 안쪽에 있던 '안터'마을과 옛날 선비 한 명이 이곳을 지나다 우물가에서 물을 청했고, 아낙네가 버들잎을 띄워줘 물을 마시려 할 때 황새가 날았다 하여 '황새말'이라는 마을) 두 마을은 합하여 서운산(棲雲山) 밑에 있다 하여 산저(山底)라 칭했다.


    율암리(栗岩里)

     율암리는 본래 홍산현 대야면의 율치리(栗峙里)·만자리(晩者里)와 해안면(海岸面)의 용암리 대사동이었다가, 1914년 군폐합에 따라 부여군 내산면에 편입됐다. 이후 율치와 용암의 이름을 따서 율암리라 불렀다. 


     율치마을은 1400년경 황토재에 조상의 산소를 모신 평택임씨가 그 산소에서 금비둘기가 날아갔다는 말을 듣자 이곳이 귀한 곳으로 알고 그 산소를 보전하고자 이주·개촌했다고 전해진다. 그후 창녕조씨 등이 입촌해 마을이 융성했다. 


     또한 마을을 둘러싼 밤나무가 많다 하여 밤고개라 불렀고 밤율자를 따서 율치라 칭했다. 만자마을은 조선 연산군 때에 창녕조씨가 입촌하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하며, 마을의 지형과 지리적 운세로 보아 운이 늦게 트인다 하여 만자실이라 불렀다.


     용암마을은 1400년경 전주이씨가 이주하여 마을이 생겼다 전하고, 마을 뒷산 서쪽에 있는 바위 밑에 용이 살았다해 용암이라 전하게 됐다.


    운치리(雲峙里)

     운치리는 조선초기 밀양박씨·김해김씨·창녕조씨 등이 각각 입촌해 형성됐다. 본래 홍산현 대야면 지역인데 1914년 안치리·죽림리·서운리와 만자리의 일부를 병합해 내산면에 편입됐다. 서운과 안치의 끝이름을 따서 운치리라 했으며, 안치·죽림·서운의 3개 마을로 구분되어 있다. 


     안치마을은 선녀 한 명이 인간으로 환생하고자 백마를 타고 날아와 신구제산에 정착했으나 또 하나의 황마가 먼저와 버티고 서 있어 이를 쫓으려했다. 이에 황마가 용트림을 하고 불총으로 백마를 쫓으니 백마는 떨어져 흔적이 없고, 황마는 그 자취를 변치않고 서 있어 질마재라 했는데 이 고개 이름을 따서 안치라 이름지었다고 전해진다. 죽림마을은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였기에 대숲말이라 부르다가 그 후 죽림이라 칭했다. 


     서운마을은 서운산 밑에 위치하였다 하여 서우내라 칭했고, 서운사가 있었다는 절터가 있다. 내산면의 중심으로 면소재지를 이루고 있으며 1974년 3월까지 5일장이 섰던 곳이기도 한다.


    운치리는 인동장씨 열녀문(烈女門)과 신갑순 효자문(申甲淳孝子門)이 있고, 특이하게 이름이 있는 바위가 많다(굴구루바위, 농바위, 마당바위, 문바위, 쉰질바위, 장군바위).


    주암리(珠岩里)

     주암리는 축융봉 산줄기 아래 자리잡았다. 이 마을은 1536년경 광산김씨와 무안박씨가 낙향하여 거처를 정하려고 느티나무 밑(현재의 내산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는)에 앉아 지형을 살피던 중, 북쪽의 지세가 좋은 녹간마을을 형님격인 무안박씨가 자리를 잡고, 이보다 못한 동촌마을을 아우격인 광산김씨가 택하여 거처를 정하여 살았다 한다. 광산김씨는 현재까지 16대에 걸치면서 마을을 융성히 했다.


     이후 주암리는 1914년 군폐합에 따라 숙동, 녹간리와 저동, 미암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주암리라 해서 부여군 내산면에 편입됐다.

    동촌마을은 서당이 있다 해 숙골이라 하였다가 그후 숙동으로 불렸다. 조선말기 동쪽에 있는 마을이라 해 동촌으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나 지금도 숙동과 동촌 두 이름을 같이 사용하고 있다.


     녹간마을은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마을지세가 목마른 사슴이 물을 먹는 형국이라 하여 녹간이라 칭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수령 1,400년된 주암리 은행나무가 자리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저동리(苧洞里)

     저동리는 국도 40호선의 서쪽으로 남북으로 길게 위치한 마을이다. 미암과 저동은 조선 선조 때에 청주한씨가 입주하여 마을을 이루었고 지우마을은 1780년경 여산송씨가 설촌하였다 전한다. 본래 홍산현 지역으로 1914년 미암리·저동리·지우리를 통합해 현재에 이르며 3개 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미암마을은 뒷산 바위에서 부처님께 봉양할 쌀이 나왔다는 쌀바위의 이름을 따서 미암이라 칭했으며, 저동마을은 모시밭이 많아 모시울이라 부르다가 그 후 저동이라 불렀다. 전통으로 매년 음력 정월 보름날 마을의 한 해 행운을 비는 동화를 세우고 있다. 지우마을은 마을의 지세가 바지게 형국이라 하여 지루지라 이름지었다 하며, 바지게에 짐이 차면 부린다 해서 재산을 오래 보존하지 못하고 입촌할 때 빈손으로 온 사람만이 재산을 모은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마전리(麻田里)

     마전리는 백제 때는 대산현에 속했으나 조선시대 홍산현 내산면 지역으로 조선중기 선조 때에 경주최씨가 마을을 형성했다 한다. 이어서 옥천전씨가 정착해 현재는 세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홍산군 내산면 지역으로 삼밭이 많이 있으므로 삼바실 또는 마전곡(麻田谷)이라 하했다. 이후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해치리(蟹峙里) 일부를 병합하여 마전리라 해서 내산면에 편입되었다.


    온해리(溫蟹里)

     온해리는 월하산(月下山) 아래 남쪽으로 펼쳐지는 지역에 위치한다. 이곳은 외산면으로 넘어가는 게재라는 고개가 있는데 명당자리가 있다 하여 지관(地官)들이 자주 찾는다. 병자호란 때의 척화신(斥和臣) 윤집(尹集)의 묘(墓)도 온해리에 있다. 온해리에 처음 정착해 마을을 형성한 씨족은 엄씨 가문으로 해마다 12월 30일에 동민들이 추모하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조선시대 중기 진주강씨, 파평윤씨의 가문이 정착하기 시작했으며, 밀양박씨, 김해김씨의 씨족이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해 갔다. 조선시대 말기 홍산군 내산면에 속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온수리(溫首里), 해치리(蟹峙里), 지우리(地隅里)의 각 일부를 병합해 온수와 해치의 이름을 따서 온해리로 부여군 내산면(內山面)에 편입됐다. 


     뜸별로는 지형이 마치 게가 기어가는 형국이라 해서 게재라고 부르고, 마을 부근에 따뜻한 물이 나오는 샘의 머리쪽에 있다 해 온수, 온머리, 온수리라하고 온수 서쪽에 있는 마을이라 서촌(西村)이라 부른다.


    지티리(芝峙里)

     지티마을은 985년경 안동장씨가 이주해 마을이 형성됐다고 전해지며, 지티고개에 위치해 지티라 불렸다.


     괴목마을은 1486년경 남원양씨가 개촌한 것으로, 그후 차씨 등이 입촌하여 마을이 융성했다. 그러나 양 성씨의 세력다툼으로 임진란 당시 의병으로 마을의 젊은 사람들이 모두 징집돼 현재에는 이 두 성씨는 한 가구도 남지 않았다. 마을에 큰 괴목나무가 있다 하여 마을 이름을 괴목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그 때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약 500여년 된 느티나무가 있다.


    금지리(金池里)

     금지리는 본래 홍산현의 지역이었다가 1914년에 군폐합에 따라 부여군에 편입돼 현재에 이르며, 금지와 산정의 두 마을로 구분돼 있다. 


     금지마을은 조선 세종 때 창녕조씨가 입촌해 형성되었다 전해진다. 월명산 중턱에 금지사가 있는데 이 절터 안에 선녀가 목욕을 했다는 샘이 있었다 하는데 현재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 샘의 이름을 따서 금지사라 하였고 마을 이름도 금지라 칭했다고 한다. 


     산정마을은 조선 태종 때 커다란 정자나무가 있었는데 신령이 나타나 이곳에 마을을 만들면 크게 흥한다해 연안이씨가 입주해 설촌촌했고, 정자나무가 있다 하여 마을 이름을 산정이라 했다한다. 


    (참고문헌:부여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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