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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여현의 토착세력은 어떤 성 씨일까?
    러블리인문학 2018. 10. 26. 14:58

    신증동국여지승람-산천조-석탄부분 (출처:부여군지)



     부여현의 토성은 심 씨, 이 씨, 서 씨, 전 씨, 형 씨, 조 씨, 고 씨, 표 씨 등 8개 성씨다.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차이가 없는데, 이는 여말선초에 이르는 시기에 부여현의 토착세력 판도가 크게 변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속성이 기록되어 있지 않은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속성으로 백 씨가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점은 이 시기의 성씨 변동을 말해주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기록에서 확인되는 대표적인 토착 성씨로는 부여 서 씨가 있다. 부여 서 씨는 『세종실록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토성조에 가장 먼저 기록되고 있을 정도로 부여지역의 대표적인 토성이었다. 


     그러나 기록상으로는 고려시대의 인물로 부모가 나쁜 병에 걸리자 손가락을 잘라 약을 지어 먹여서 병을 낫게 한 고려시대의 효자 서공의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조선왕조실록』 1454년(단종 2) 8월 17일에 보일 뿐, 조선 전기의 인물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1552년(명종 7)에 사마시에 급제해 진사가 된 서숭수(장사랑의 아들) 정도만 확인되고 있어 부여 서 씨가 조선초기에 이미 이 지역을 떠나 다른 지역에 정착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밖에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부여현의 우거 인물로 고려 후기 1366년(공민왕 15) 우정언으로 있으면서 신돈의 횡포를 규탄하다 왕의 노여움을 사 장사감무로 좌천되었다가 후에 석탄에 임시로 거주하던 이존오(1341∼1371)와 남편이 악질(惡疾)에 걸리자 손가락을 잘라 병을 낫게해 1519년(중종 14)에 명정을 받은 갑사 박원형의 처 이씨가 기록돼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산천조에는 이존오 자신이 석탄에서 거닐면서 읊은 시와 정도전·정몽주·이색 등이 지은 시가 수록되어 있다. 또, 이존오의 아들인 이래의 부탁으로 안로생이 지은「석탄정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석탄정기」에는 석탄에 당시 이존오의 별장이 있었고, 이로 말미암아 이존오가 석탄에 우거하였음을 밝힌 내용이 기록돼 있다. 현재는 석탄정은 남아 있지 않고, 부여읍 지석리 내유촌에 이존오의 정려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외에도 지리지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부여현을 대표하는 가문으로 하동 정 씨를 들 수 있다. 하동 정 씨는 석성현감을 지낸 정흥인과 그 아들 정인지가 확인된다. 


      『조선왕조실록』 1478년(성종 9) 11월 26일 정인지의 졸기에 보면, 1430년(세종 12) 당시 정흥인이 노경으로 부여현에 살고 있으므로 정인지가 돌아가 봉양하기를 희망했으나 세종이 윤허하지 않고 충청도 관찰사로 제수했다. 


     세조 4년(1458)에는 유교와 불교의 시비를 논하다가 세조의 노여움을 사서 부여현에 부처되는 등 조선초기부터 부여와 관련이 깊었다. 임진왜란 때 활약한 정득열을 비롯하여 효자 정택뢰, 정천세, 정택뢰의 처 정씨 등 4명의 정려는 이후에도 하동 정 씨가 이 지역에 지속적으로 세력을 유지했음을 알려 주는 것이다. 


    (참고문헌:부여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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