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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낙화암 인근에 ‘낙화생’을 심다-야산 中
    러블리인문학 2018. 3. 20. 00:14

     

    야산 이달 선생은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나던 해 봄에 피난민과 제자 등 일행들과 함께 부여읍으로 거쳐를 옮긴다. 그리고 지금의 정림사지 오층석탑 주변 구아리와 동남리 일대에 촌락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백성들의 생계를 고민하다>

    야산 선생은 일행들이 먹고 살 양식이 부족함에 깊은 고민을 했다. 그가 이 같은 고민을 한 것은 이 때만이 아닌 것이 드러난다.

     

    용정3리 청마산성 아래 위치한 그의 묘소 입구에도 제자들이 세운 비석에 많은 이들을 구제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곳에는 전란 중에 많은 이들의 목숨을 구하고, 생계를 잇게 해준 내용은 나와 있지만, 일제강점기 시절 일화는 기록되지 않았다.

     

     

    <낙화암 백사장에 땅콩을 심다>

    지금은 백마강 주변에 땅콩을 찾아볼 수 없지만, 강 주변 백사장은 수박밭으로 변하기 전까진 땅콩이 자라던 곳이었다. 이 땅콩은 6.25전쟁 이후에 심어지기 시작했는데, 이 일을 주도한 사람이 야산 선생이다.

     

    야산 선생은 제자들과 피난민의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땅을 찾아야 했다. 그 땅은 누구도 소유하지 않아야 하고, 욕심내지 않을 곳이어야 했다.

     

    그리고 그가 찾은 곳이 드넓은 강변의 백사장이다. 비만 오면 침수와 범람으로 농작물 피해가 심한 곳이기도 하며, 땅은 모래가 많아 배수가 심해 건조한 곳이다. 결국은 벼도 심을 수 없고, 감자도 심을 수 없는 곳이어야 했다.

     

    아무도 소유하지 않은 모래밭에 땅콩을 심기 시작했다.

     

    땅콩은 낙화생(落花生)이라고도 불린다. 꽃이 핀 뒤에 떨어져야 열매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또 지두(地頭)라고도 불리는데, 땅 속에서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땅콩은 배수가 잘되고, 건조한 땅에서 재배가 가능하다. 비옥한 땅에서는 절대 재배가 불가능한 품종이다. 더군다나 백마강처럼 범람이 심한 곳에서도 물살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농작물인데, 그 뿌리가 얽히고설켜있는 모습이 꼭 잔디가 새끼를 쳐 나가는 모습처럼 땅을 잔뜩 움켜잡고 있다.

     

    그리고 부여는 담배와 인삼에 이어 땅콩의 주산지 중 하나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한 줌의 땅도 허비하지 않는 고장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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