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류영희 씨의 인생 엿보기
    러블리부여인 2017. 6. 22. 12:40


     100세 시대다. 교직생활을 퇴직하고 일흔이 넘은 나이에 만난 류영희(72)씨는 요즘 하루하루 감사하게 생각하며 행복한 나날을 살아가고 있다. 그는 “‘백수가 바쁘다’더니 현직에 있을 때보다도 더 바쁘게 생활하고 있으니 참 다행스런 일”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1남 2녀 자식은 모두 결혼해서 나름대로 잘 살아가고 있고, 어여쁜 손자 손녀가 커가며 재롱을 부리는 모습  보면서 ‘이게 행복이지’라고 생각한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특별한 부를 가지진 못했지만 평범함 속에서 찾는 행복이 얼마나 행복한지, 넉넉하진 않지만 없는 가운데 나누며 살 수 있는 삶이 얼마나 값진 인생인지 새삼 느끼곤 한다. 



     그렇다고 류영희씨 인생에 시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누구나의 삶에는 굴곡이 있기 마련이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그의 인생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넉넉하지 않았던 집안 살림에 대학을 가는 건 무리였다. 그가 중·고등학교 다니는 동안 여동생들은 중학교 진학은 꿈도 꾸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고등학교 졸업은 할 수 있었지만 그 이후의 공부는 포기했다. ‘이젠 농사꾼이 되나보다’라고 체념을 하면서 2년 동안 아버지 일을 도와 농사를 시작했다. 


     그렇게 두 해가 다갈 무렵 또 다시 입시철이 되었는데 공주교대를 다니는 친구가 원서를 가지고 집까지 찾아왔다. 시험을 보라고 권하는 것이다. 2년 동안 농사일만 하던 그가 공부를 다시 시작하는 건 두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교육대학은 2년제이면서 학비가 얼마 들지 않는다'는 이야기에 농사일을 하면서 틈틈이 공부를 시작했다. 그렇게 그해 시험에 합격했다. '친구들보다 늦은 2년의 시간동안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공부를 시작해 꿈에 그리던 대학생활이 시작됐다. 



     그에게 인생에서 잊지 못할 순간으로 꼽은 것은 대학교 2학년에 외국여행이다. 그 당시 외국을 나가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월남의 국군장병을 위로하기 위한 연예인 위문단과 학생 위문단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60년대 국비로 해외여행은 꿈같은 일이었다. ‘파월장병위문단에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베트남에서 우리나라가 조금 더 강한 나라, 통일국가가 되길 바라는 마음을 가득안고 돌아왔다”고 회상했다. 


    “위문단으로 다녀오면서 사온 ‘C레이션’(월남전에 참전했던 한국군 및 미국 장병들의 전투식량)을 안주로 마을 사람들과 함께 막걸리 파티를 했어요. 마을에선 대단하다며 경사가 났다고 축하해 주었죠. 다녀오고 나니 무사히 임무를 마칠 수 있음에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어요.”




    그리고 곧 그에게 꿈에 그리던 교직생활이 시작됐다. 부여초등학교를 시작으로 부여에서의 42년간의 교직생활을 대가없이 마무리 지었다.


     그는 “학생들이 잘 따라주지 않아 정말 힘들고 화가 날 때는 반장을 나오게 한 후 ‘내 종아리를 때리라’고 했다. 반장은 선뜻 때리지 못했고, 나는 그 날 내 종아리를 내 손으로 때렸다. 학생들은 ‘잘못했다’며 울고불고 법석을 떨었다. 그 때의 그 순수했던 아이들이 지금 어떻게 자랐을지 궁금하다”고 가장 기억에 남는 교직생활로 꼽았다.


     교직생활을 되돌아보면 참으로 많은 일을 했다. 많은 학생들이 나의 제자가 됐고, 인생의 반려자를 만났으며, 1남 2녀의 사랑스런 자식을 낳았다. 





     류영희 씨에게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그는 마지막으로 “그저 오늘만을 생각하고 기쁜 마음으로 행복을 찾아 누리는 것이다. 행복은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행복의 스위치를 켜고 살아야 해요”라며“내 인생도 백제 문화처럼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라는 말처럼 그러기를 바래요”고 소망을 전했다. 그의 여생이 은빛으로 빛나길 함께 응원해본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