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블리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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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엔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을까?러블리인문학 2018. 10. 23. 15:31
인류의 역사는 구석기시대부터 시작됐다.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구석기시대 유적이 알려진 것은 1933년이다. 두만강 연안에 해당되는 함경북도 종성의 동관진에서 발견된 유적이 그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일제시대였던 만큼 일제의 식민주의사관으로 인해이 유적은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한 채 잊혀지고 말았다. 이후 구석기 유적의 존재는 해방 후 우리 나라 학자들에 의해서 비로소 그 존재가 확인됐다. 해방 후 처음으로 구석기의 존재가 알려진 것은 1963년에 북한에서 있었던 함경북도 웅기군 굴포리 유적의 조사에 의해서였다. 당시 조사는 청동기시대와 신석기시대 유적을 조사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신석기시대 패총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그 아래층에 있었던 구석기 문화층이 우연히 발견됐던 것이다. 1964년에 미국인 앨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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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쓰카 운이치 <백제의 옛 수도>러블리인문학 2018. 5. 28. 14:35
부여에는 몇 백 년 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오래된 석탑이 하나 있다. 부여토박이들 사이에서는 백제탑이라 불리며, 금동대향로와 함께 부여라는 도시의 자랑스러운 상징이자 백제시대의 석탑 양식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백제양식의 석탑으로 역사책에 소개되기도 한다. 반면, 소정방이 백제 점령 후 1층 탑신부 사면에 ‘대당평제국비명’이라 새긴 글귀 때문에 소정방이 세운 평제탑이라는 오명을 한동안 가지고 있기도 한 안타까운 기억을 간직한 탑. 바로 국보 제9호 정림사지 오층석탑이다. 히라쓰카 운이치는 창작판화를 확립한 일본 작가로, 국화회판화부의 창립에 힘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 과 등 우리나라를 소재로 한 그림이 상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 탑을 보고 스케치한 구도라는 히라쓰카 운이치의 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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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일정(六一亭), 활을 내다러블리인문학 2018. 5. 26. 17:04
오후 2시. 초여름 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시각. 백제교 다리 밑에 모여든 이들은 바른 자세로 앉아 있다. 벗들을 만나면 떠들기 일쑤인데, 이들은 무엇을 위해서인지 그저 점잖은 자세로 무언가를 기다린다. 궁사들에게 추위와 더위, 악천후 등 변덕스런 날씨는 그저 시위를 당길 때 고려해야 할 계산의 일부다. 차들이 다리 위를 지나가며 덜컹대는 소리도, 변덕을 부리는 백마강 강바람도, 처음 마주친 이가 어슬렁대는 것도, 정신을 집중하는데 전혀 방해의 요소가 되지 못한다. 남영공원 육일정을 놔둔 채, 이름 석자만 들고 천막 하나에 의지하며 백마강변으로 나온지 1년 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곳을 나오기란 여간 여러운 일이 아니었다. 수십 년을 지냈던 보금자리를 선뜻 내놓기란 궁사들 사이에서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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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의 사상가 ‘야산 이달’ - 下러블리인문학 2018. 3. 26. 23:25
난세의 사상가인 야산 이달(也山 李達). 그를 본 후손의 시각은 어떨까? 손주인 사단법인 한국홍역문화원 이응국 대표가 지난 2017년 2월, 야산 선생의 평전을 써냈다. 그는 야산 선생의 손주이면서 주역의 제자이기도 하다. 물론, 그는 야산 선생의 가르침을 직접 듣지 못했다. 다만, 현존 주역의 대가이며 야산 선생의 제자인 ‘대산 김석진’ 선생, 역사학자 이이화 등으로부터 가르침을 이어받았다. 그러면서 제자들이 모여 앉아 추억하던 스승 ‘야산’의 이야기를 귀동냥으로 듣고 자랐다. 그리고, 여러 고증을 거쳐 조부의 일대기에 대해 서술했다. 대전의 한 작은 커피숍에서 만난 이응국 대표는 “야산 선생을 이야기하려면 주역을 한 번이라도 읽어야 이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야산 선생이 살아온 일화를 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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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화암 인근에 ‘낙화생’을 심다-야산 中러블리인문학 2018. 3. 20. 00:14
야산 이달 선생은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나던 해 봄에 피난민과 제자 등 일행들과 함께 부여읍으로 거쳐를 옮긴다. 그리고 지금의 정림사지 오층석탑 주변 구아리와 동남리 일대에 촌락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야산 선생은 일행들이 먹고 살 양식이 부족함에 깊은 고민을 했다. 그가 이 같은 고민을 한 것은 이 때만이 아닌 것이 드러난다. 용정3리 청마산성 아래 위치한 그의 묘소 입구에도 제자들이 세운 비석에 많은 이들을 구제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곳에는 전란 중에 많은 이들의 목숨을 구하고, 생계를 잇게 해준 내용은 나와 있지만, 일제강점기 시절 일화는 기록되지 않았다. 지금은 백마강 주변에 땅콩을 찾아볼 수 없지만, 강 주변 백사장은 수박밭으로 변하기 전까진 땅콩이 자라던 곳이었다. 이 땅콩은 6.25전쟁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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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란, 부여에 그가 왔었다-야산上러블리인문학 2018. 3. 20. 00:10
금성산과 남영공원을 잇고 있는 계백문. 지맥잇기 사업으로 세워진 계백문 끝에 큰 거북이가 기단으로 있는 비석이 있다. 비석에는 ‘야산이달선생강역사적비(也山李達先生講易事績碑)’라고 쓰여져 있다. 난세의 사상가인 이달 선생의 공적비이다. 야산 선생은 조선 말인 1889년에 태어나 한국전쟁을 치르고 난 몇 해 후인 1958년 생을 마치기까지 신화를 일군 ‘주역’의 대가다. 젊은 시절에는 세상을 떠돌며 미친 척을 하던 그는 ‘주역’ 뿐 아니라, ‘도교’와 ‘불교’, ‘제자백가’까지 섭렵했던 ‘도학’의 대가다. 경북 김천 출신인 그의 공덕비가 충남 부여에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우리 민족이 해방을 맞은 후 야산 선생은 대둔산에 들어가 108명의 제자를 키웠다고 한다. 그리고 1948년 야산선생이 곧 전쟁이 벌어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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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점보다 800년앞선, 백제의 면직물러블리인문학 2018. 1. 24. 07:17
문익점보다 800년앞선, 백제의 면직물 부여 능산리사지서 국내 최고 면직물이 발견됐다. 이 면직물은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지고온 시대보다 800년 앞선 것으로 백제시대의 면직물 발견으로 한국 면직의 역사를 다시 쓰고 있다. 이 면직물은 씨줄 날줄로 이루어져 있는데, 자세히 보면 가로로 넣는 실에 꼬임을 많이 줘서 직조를 한 것이 특징이다. 보온성도 좋고 무늬 자체도 아름다운 면직물은 당시 중국에 없는 백제만의 독특한 직조법이라는 사실에 큰 획을 그었다. 백제시대의 면직물 발견으로 문익점보다 800년이나 앞선 백제에서도 면직물을 사용했다는 증거가 된 셈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문익점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나라에 목화씨를 처음 먼저 가져온 인물이다. 고려 말 학자 문익점(1329∼1398)은 36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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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오천결사대 충혼제러블리인문학 2017. 12. 26. 23:35
백제오천결사대 충혼제는 백제말 계백장군과 함께 황산벌 전투에서 싸운 무명 오천결사대의 넋을 위령하는 제전의식이다. 부여군재향군인회 주관으로 백제오천결사대 충혼탑에서 봉행되고 있다. 최초의 오천결사대 충혼제는 1990년 9월 27일이다. 660년 7월 9일 황산벌에서 계백 장군과 함께 전사한 백제 무명의 오천결사대를 위해 백제 삼산 중 하나인 오산(현 오석산) 정상에 설치된 제단에서 봉행됐다. 부여읍번영회에 의해 1989년 10월 처음 봉행된 오천결사대 충혼제는 그 해 최초로 백제문화제 제전 종목으로 채택돼 부여읍번영회 주관으로 제향을 올렸다. 이후 2000년에는 구드래 행사장에서 ‘삼국사기’에 기록된 신라 5만 대군에 맞서 싸우는 황산벌 전투 출정에 앞서 계백장군의 결연한 의지를 다지며 처자의 목을 베는..